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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글이 흔들린다] 16. 영어·일어식 번역투 문장 넘쳐

  ‘김실장은 바로 전날에는 각 지방의 지역신문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는 방송사 기자들과 차례로 같은 성격의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청와대의 모 비서관이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기사문의 일부이다. 기자도 글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인데 이 문장은 좀 심했다. 한 문장 안에서 가능하면 동어 반복을 하지 않는 것이 글쓰기의 원칙인 것은 접어두겠다. 습관적으로 많이 쓰는 ‘가지다’라는 번역투 표현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간담회를 가졌다’는 영어의 번역투 문장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해서인지 영어에서는 유난히 소유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 많다.
  간담회는 물질이 아니기에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바르게 고쳐보면 이쯤 될 것이다. ‘김실장은 바로 전날에는 각 지방의 지역신문 기자들과, 일주일 후에는 방송사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했다.’
  이같은 번역투 문장은 외국어를 직역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법체계를 반영하다보니 우리말을 왜곡한 결과로 굳어진 것이다.
  언어의 속성상 반복적으로 이를 접하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습관처럼 고착될 위험성이 있으며 벌써 그렇게 된 것도 많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에겐 없는 영어의 전치사와 관련해서 많이 보인다.
  조금이라도 원뜻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나온다.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은 정치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정치로부터’의 ‘…로부터’는 전치사 ‘from’을 표현하다 굳은 것인데 이제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올바르게 고치려면 ‘… 정치에서 배제되었다’로 표현하면 된다. 이밖에도 ‘…을(를) 통해서(through)’ ‘…에 의해서(by)’ 등 직역투의 문장이 우리말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한국은 우리에게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 중 하나다.’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우리의 어법과 맞지 않는다. 영어에서는 사물을 비교하는 표현이 많다. 비교해서 제일 좋은 것이 최상급인데 최상이라면 하나라야 이치에 맞건만 그런 최상이 여럿이니 문제다. ‘가장 중요한 시장이다’라거나 ‘중요한 시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 문제가 없다.
  번역투 문장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수동태이다. ‘그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이란 것이 나의 적극적인 의사 활동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란 말인가? ‘생각합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단정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을 꺼리는 소극적인 태도가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을 낳은 것 같다.
  우리말에는 일어의 번역투 문장도 많다. 말꼬리를 흐리면서 분명하게 매듭짓지 못하는 문장이 그런 경우인데, 젊은이들 사이에선 일본어 만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번역투가 무서운 속도로 전달되고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필살기(必殺技)?’
  명사를 이용하여 문장을 끝내는 독특한 어투인데 문장구조 자체가 왜곡되는 폐단이 있다. ‘필살기인가요’나 ‘필살기로군요’로 바꾸는 것이 좋다.
  국제화시대에 우리말이 외래어와 부딪히고 넘나듦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현상이다.
  그것은 우리말에만 있는 현상도 아니다. 세계화를 추구하는 나라의 언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국제화나 세계화의 목적은 결국 우리의 삶을 좀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행복을 구가하기 위함이다.
  우리말을 훼손하고, 망가뜨려 정체성을 상실한 다음에 얻는 국제화나 세계화의 결실이 과연 달콤할까? 번역투 문장의 폐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 작은 예일 수도 있다.
  외국어 표현들을 철저히, 그리고 충분히 우리말로 순화해서 쓰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요즘이다.


경향신문 / 고정욱(소설가) / 2004. 8. 31. 18:45:10 최종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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