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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한국에서 45세로 산다는 것

좋은 글 읽기 조회 수 8354 추천 수 157 2006.11.12 19:02:29
 
1960년대에 태어나 격변의 시기였던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원조 386세대’.


젊은 시절 우리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이루어낸 그들이 이제는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기성세대의 한가운데 선 386세대 대다수는 이제 ‘시대’나 ‘사회’에 관한 거대담론보다 삶의 터전인 직장과 가족과 개인의 소박한 꿈을 얘기하는 처지로 바뀌어 있다. 가정과 사회의 ‘허리’인 이 땅의 45세 남성들,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왜그들을 386이라고 부르는가.

1960년, 이 땅에 4·19혁명이 있었다. 그 해, 새로운 기운처럼 그들은 이 땅에 태어났다. 후일 우리 사회는 그들을 386세대의 맏형이라고 불렀다. 386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던 당시 그들은 30대였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대학에 다닌 1960년대 생의 맏이라는 뜻이었다.

애초 그것은 컴퓨터에(정확하게는 컴퓨터 제품 등급으로) 쓰던 말이었다. 지금은 만 나이로 따져도 마흔다섯이나 되어 버린 그들이 30대였던 시절 기존의 286 컴퓨터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386 컴퓨터가 나왔던 것인데, 이 ‘386’이라는 별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절 컴퓨터 사정에 대해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0여 년 전, 전업작가로 나서기 전 내가 어느 금융기관에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그전의 컴퓨터들은 전원을 넣은 다음 지금과 같이 마우스로 바탕화면의 아이콘을 클릭해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자판을 두드려 도스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했다. 대기업에도 부서마다 컴퓨터가 한두 대 공용으로 비치돼 있는 정도였고, 내가 다니던 금융기관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직원들의 절반 정도는 컴퓨터 이용은커녕 그것을 실행하는 도스 명령어가 뭔지 조차 모르는 컴맹들이었다.

나이 50이 넘거나 가까이 된 부장과 차장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당연했고, 40대 초반의 과장들 역시 3분의 1은 알고 3분의 1은 컴맹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컴퓨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사무실에 컴퓨터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이 있던 자리에 전동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전동타자기보다 조금 더 세련된 양식으로 보고서를 인쇄하는 기계 정도로만 여겼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이 배울 필요 없이 아랫사람에게 보고서 작성과 인쇄를 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부서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대리들과 평사원들만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관의 장이 전 직원 모두 이른 시일 내에 컴퓨터를 익히라고 지침을 내렸다. 3개월 후 전국 부점장들부터 시험을 보게 해서 불합격자는 인사고과와 부서 이동에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50대거나 40대 후반의 부장과 차장, 또 과장들은 전보다 두 시간쯤 일찍 일어나 시내 컴퓨터학원의 새벽반에 등록했다. 그들로서는 회사 말년에 수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도 절반은 끝내 도스 명령어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때 내가 다니던 회사뿐 아니라 어느 회사든 부장과 차장들은 대부분 1940년대 생이었다. 많게는 1930년대 후반생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젊은 신입사원들이 1대1 과외를 하듯 가르쳐 줘도 눈앞에서 배울 때뿐, 돌아서면 도스 명령어도 컴퓨터 자판의 글자 위치도 금방 잊어버렸다.

그들은 신입사원 시절에도 타자 한 번 안 치고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는 부서마다 타자를 전담하는 여직원이 따로 있었고, 서울 종로에 그런 타자수만 양성해 내는 ‘클로바 타자학원’과 ‘뉴욕 타자학원’이라는 대형 학원이 있었다.

그렇게 사무실의 중간 자리에 앉아 허리 역할을 하던 1950년대 생들은 그야말로 힘들게 도스 명령어를 배우고, 컴퓨터에 업무 내용을 저장하고 그것으로 보고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회사 업무와 관련해 컴퓨터를 익히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어느 책 제목대로 ‘도스를 완전 정복하는 법’이었다.

바로 그런 때 마우스로 아이콘을 클릭해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 프로그램이 나왔고, 컴퓨터의 용량 역시 업그레이드돼 386 컴퓨터가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따 우리 사회에 새롭게 진입한 젊은 세대를 386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호칭 안에는 40년대 생과 50년대 생들 스스로 자신들을 도스 명령어를 입력하던 286 컴퓨터로 자조하여 말한 부분도 있었다.

윗세대인 1940년대 생이나 1950년대 생들이 볼 때 그들은 확실히 자신들과 달랐다. 마치 지금의 10대가 어른들 눈에 휴대전화 없이는 아무 일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종의 인류처럼 보이듯, 그때 당시 386세대야말로 우리 사회에 새로운 사고를 가지고 진입하는 새로운 세대처럼 보였던 것이다.

앞 세대와는 달랐던 386 신입사원들

그들은 회사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업무 혁신뿐 아니라 이제까지의 직장문화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그 회사의 신입사원과 여직원이 가장 먼저 출근했다. 일찍 출근해 남자 신입사원은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었고, 청소원이 따로 없는 경우 그들이 마대 걸레를 빨아 사무실 청소를 했다. 여직원들은 남보다 일찍 회사에 나와 집에서도 씻지 않는 찻잔을 씻고 찻물을 끓였다.

그 시절, 내가 근무하던 금융기관에서도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써야 했다. 쓰지 않겠다고 울고불고해도 소용없었다. 어떻게든 회사는 그 부서의 책임자를 통해 결혼하는 여직원의 사표를 받아냈다. 회사에 들어올 때 여직원에게는 기한부 노비문서처럼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미리 받아두기도 했다.

그 각서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무렵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그릇된 관행이 우리 사회의 한 전통이거나 불문율처럼 지켜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것에 맞서 싸웠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사회 분위기 역시 매번 그들 편이 아니었다. 저마다 사정은 이해하면서도 “여자가 결혼했으면 그만두는 거지, 뭘 자꾸 다니려고 그래”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것이 1980년대 중후반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이 그들에게 윗세대에게 주지 않았던 혜택을 새롭게 주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의 개선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이 사회에 새로 진입하며 이제까지 잘못된 관행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바꾸어 놓았던 부분들도 많았다.

3년 가까이 군복무 기간을 거쳐야 하는 남자들보다 먼저 1960년대 생 여직원들이 회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결혼과 동시에 강요되는 사표를 집단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회사를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며 완강하게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위의 1950년대 생 선배들은 회사의 힘에 굴복해 울면서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회 분위기 역시 몇 년 사이 확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는 내내 민주화운동을 했거나 하는 것을 지켜본 세대답게 그동안 당연한 관행처럼 강요되던 불합리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권익과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우리나라 기업들 여사원 유니폼에 임신복이 처음 등장한 것도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여사원에 대한 우리나라 모든 회사의 고용 관례는 법이라기보다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강요하는 야만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내가 다니던 금융기관의 경우도 결혼한 다음 임신해 배가 부른 여행원은 창구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며, 그러면 바로 그 은행의 수신고가 떨어진다고 여겼다. 회사의 인식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이 아직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회사나 조직보다 ‘나’와 ‘개인’중시

그리고 그때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남자 1960년대 생들이 속속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사이였다. 1987년 민주화운동 때도 그들은 점심시간과 퇴근 후 넥타이 차림으로 거리로 나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직장의 회식문화를 바꾼 것도 이들이었다. 그전에는 부서 회식이 있으면 모든 부서원이 개인적인 일을 제쳐놓고 회식에 참여했지만 이들은 일과 후 시간까지 회사 일로 통제받고 싶어하지 않았고, 선배들처럼 싫은 자리에 억지로 나가지도 않았다. 회사와 조직보다 나와 개인을 중시했다. 그것 또한 1950년대 생이나 1940년대 생 선배들에게는 신세대의 버릇없는 개인주의로 비치기도 했지만, 이내 그 자체로 새로운 물결의 문화로 받아들여졌다.

사기업에서 ‘저녁밥 먹기 전 퇴근’을 처음 실행한 것도 이들이었다. 1950년대 생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삼일절·현충일·제헌절에도 회사에 나가 밤 10시까지 일하고 들어왔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선배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퇴근시간이 늦기로 소문난 어떤 대기업의 경우는 회사 식당에 매일 저녁 식단을 붙여 놓았는데, 저녁식사 인원을 점심식사 인원의 4분의 3 정도로 잡으면 거의 틀림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들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사회에 진입한 새로운 세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눈치보며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 그런 눈총이라도 보일라치면 더욱 당당한 모습의 ‘칼퇴근’으로 맞섰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회사마다 새롭게 조직되고 보강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전위에도 이들이 섰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변혁기라고 할 1980년대에 대학에 다녔고, 그 기간 내내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대답게 앞뒤 세대보다 더 정치적 감각도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도 1970년대 유신 시절 학내운동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이들이 사회로 진입하며 보여주었던 모습은 확실히 그 위의 세대들과는 다른 신인류의 출현이었던 셈이다.

그들이 사회에 진입했을 때 오히려 상대적으로 안쓰러워 보이던 쪽은 그들과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 1950년대 중후반 생들이었다. 386 식으로 설명하자면 당시 30대 후반이거나 이미 40대에 진입했으며 1970년대 암울하기 짝이 없던 유신 시절 대학에 다닌 1950년대 생들인 이들은 그 시절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나 이쪽저쪽 세대에 파묻힌 골짜기 세대처럼 보였다.

회사에서도 1940년대 생 간부들과 1960년대 생 신세대 사이에 끼여 자기 색깔도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위에서는 옛날 방식으로 찍어 누르고, 아래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가치를 가진 일군의 신세대가 치받으며 올라오는 형국이었다.

그런 시절 어쨌거나 386세대의 장자(長子)들은 젊은 시절 빛을 몰고 빛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이 사회에 진입했다.

386 맏형의 고백 - "먼가 속은 느낌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만나이로 마흔다섯이 되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한 살 더 먹고 들어가는 우리 나이로 보자면 마흔여섯이 된 것이다. 그러면 젊은 시절, 그들의 모든 것이 빛이기만 했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빛 좋은 개살구랄까, 출발부터 뭔가 내 자신으로부터든 사회로부터든 속은 듯한 느낌도 많이 들어요.”


어느 제약회사 중견간부로 일하는 P씨의 말이다. P씨야말로 1960년에 태어나 올해 마흔다섯이 된 386세대의 맏형이다. 어떤 부분이 속은 듯한 느낌이 드느냐고 묻자 정치·문화·경제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했다. 그건 너무 막연하고, 좀 자세하게 말해보라고 했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증권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3저 현상’으로 우리 경제가 무척 좋은 시절이었거든요.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전두환 씨가 철권을 휘두르던 시대였지만, 일단 경제 여건이 좋은 데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입만 열면 모두 ‘팔육팔팔’을 떠들었거든요.

그때 ‘3저’라는 게 저유가·저금리·저달러 시대라는 얘기인데, 저유가와 저금리가 우리에게 왜 유리한지는 다들 쉽게 이해할 거예요. 그렇지만 저달러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국가인데, 실제로 저달러라고 하면 오히려 수출 가격경쟁력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1980년대 중반의 저달러는 우리나라의 원화에 대한 저달러가 아니라, 일본 엔화에 대한 저달러 현상이었어요. 그때 달러당 100엔 선이 언제 허물어지나 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어요. 일본은 연일 죽는다고 아우성이었고, 그런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대외 교역 조건이 좋아진다는 뜻이거든요. 그동안 일본이 장악했던 세계시장에서도 저절로 가격경쟁력이 좋아져 수출이 팍팍 늘어났던 거지요. 우리가 입사하고 나서도 2년 정도 경기가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왜 속은 듯한 느낌이 드느냐고 묻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우리 사회의 직장문화랄까 분위기는 평생고용, 평생직장 개념이었어요. 입사해서 신입사원 연수 때 들었던 말도 ‘여러분은 앞으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회사 일만 열심히 해라. 그러면 여러분과 앞으로 여러분이 이루는 가정은 회사가 책임진다’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우리가 사회 초년병 시절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어요.

어떤 식이었느냐 하면 1988년 올림픽 직전에 주가지수가 1000 가까이 올라갔어요. 우리나라 증권사와 경제연구소는 올림픽 이후 1년 안에 2000을 돌파한다고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고, 일본 노무라증권연구소는 그런 우리의 전망에 심술을 부리듯 600선 아래로 떨어질 거라고 말했는데, 1년쯤 지나자 그 예측이 정확했던 거지요. 그러자 회사도 그동안 늘렸던 지점과 인원부터 줄였던 거지요. 주식에서 ‘깡통’이라는 말도 그때 나왔고.”

그 무렵 그는 증권사에서 나와 제약회사로 직장을 옮겼는데, 지금도 그때 증권사 객장에서 겪은 씁쓸한 일 한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증권투자를 하는 것도 땅투기를 하듯 ‘묻지마’ 식이고, 그래서 손해가 나면 정부보고 보상하라고 객장에 나와 데모하는 나라입니다. 증권사 광고는 물론이고 정부가 공익광고를 통해 주식투자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라고 홍보하는 나라도 세계에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 전두환 씨가 백담사에 가 있었는데, 올림픽 끝나고 주가가 곤두박질치자 대번에 증권사 객장에서 터져나온 구호가 ‘전두환을 다시 청와대로’였거든요. 모든 판단의 척도가 돈이라는 거지요. 그때는 젊어서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40대 중반이 된 지금 제 척도가 바로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아요.”

‘윗 세대’에 대한 상대적 빈곤감도 커

P씨의 후배이며 1988년 금융기관에 입사한 1961년생 A씨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 나이로 마흔다섯 살이 되었지만, 사실 거의 빈손이나 마찬가지예요. 대학 동창들 중에도 더러 운이 좋아 크게 한몫 잡은 친구들도 있지만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고만고만하지요. 사회생활을 한 지 17년이 되었지만 출발할 때 부모로부터 따로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서울 변두리거나 신도시에 서른두 평이거나 스물예닐곱 평짜리 아파트 하나 가지고 있고, 아내와 두 자녀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도 거의 비슷하고요. 그것도 부부간에 사네 못사네 하는 문제 없이 잘 운용한 경우지요. 다른 세대들은 말끝마다 386, 386 하면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퍽 대접이나 받으며 직장생활을 한 세대처럼 여기지만, 사실 우리야말로 선배들 세대에 비해 출발부터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며 사회생활을 했던 겁니다.”

그 이유를 A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입사했을 때 금융기관들은 다른 회사들과 달리 회사 간부들의 나이가 비교적 많았어요. 부장들은 대개 50대 초반이거나 중반이었고, 차장들은 40대 후반, 과장들은 40대 초반이거나 30대 후반이었지요. 내가 처음 배치되었던 부서의 부장이 54세였는데, 그분은 26세에 어느 국책은행에 입사한 다음 30대 초반에 신설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지점을 개설하며 영역을 확장할 때 38세에 1급 부점장이 되었답니다. 입사 후 12년 만이지요. 그때 이미 그분은 28년 직장생활 중 16년을 부점장 생활을 했고, 그 무렵 정년이 58세에서 60세로 늘어난 것까지 계산하면 전체 34년의 직장생활 중 부점장만 22년을 한 것입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금융기관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그때 이미 부점장급이던 사람들은 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며 고속 승진에 장기간의 간부직까지 안정된 직장생활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입사와 더불어 승진 적체가 함께 시작되었던 거지요. 거기에 우리보다 5년쯤 나이가 앞선 선배 세대들만 해도 금융기관에 근무한 사람으로 서른네다섯 살쯤 되면 어떤 식으로든 자기 힘으로 서른두세 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하더군요. 그때 국내 금리는 비교적 고금리였는데도 직장에서 장기간 저리로 주택자금도 대출해 주고, 또 그 선배들이 집 장만할 무렵 회사 안에서 수시로 주택조합을 설립해 내 집 장만에도 도움을 주고요.

그런데 우리가 결혼해 그 나이쯤 되었을 때는 직장 안팎에서 그런 혜택들이 거의 사라져 버렸어요. 선배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직장주택조합의 메리트도 거의 사라지고. 그리고 우리가 입사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래서 집이 필요하던 그 5년 사이에 서울 집값이 3배는 뛰어버린 겁니다. 올림픽 무렵에는 한 해에만 집값이 2배로 뛰었어요.”

그는 한 사람이 성장해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동안 그의 삶을 안정시키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안정적 직장, 둘째는 삶의 터전인 주택문제 해결, 셋째는 부부 화합, 넷째는 자녀교육인데 386세대의 맏이 격인 자신들이야말로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게 없다고 했다. 예전에는 사회 변혁에도 큰 관심을 가졌던 세대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먹고 사는 문제와 아이들 키우는 문제에만 매달리게 된다고 했다.

극 소수만 누린 ‘386 프리미엄’

“사실 386세대라는 말만큼 대다수 386세대와 상관없이 붙여진 말도 없을 겁니다. 386세대라는 정의는 우리가 사회에 진입하던 시절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언론 쪽과 말 만들어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호칭의 특혜는 대학 다니던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지금 그 연장선에서 정치를 하는 그야말로 386에서도 극소수 친구들만 마치 자신들이 우리 세대 전체의 가치관과 의견을 대표하는 양 누리는 거지요. 그리고 또 덕을 본 사람이 있다면 그 시절, 시대의 고민을 지금까지도 혼자 다 하는 듯 후일담을 얘기하던 몇몇 작가들이 있겠지요.”

이 말은 젊은 시절 한때 문화운동을 했던 어느 386 친구의 생각이다. 그 친구의 말처럼 아직도 그 세대에 대해 386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정치 쪽과 그쪽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밖에는 없다.

“IMF가 온 것은 우리가 서른일곱 살이던 해였어요. 결혼하고,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였는데, 나이로 보자면 직접적인 감원 대상이거나 퇴출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 직장생활을 해나가는 게 마치 장대 하나 들고 담장 위를 걷는 것 같은 거지요.”

“위의 선배세대와 우리 세대의 차이 중 하나라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배세대보다 우리 세대는 젊은 시절 맞벌이 부부가 많았어요. 선배세대는 여자들이 결혼 후에도 계속 직장을 나갈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게 학교나 병원, 공무원 등 몇 가지 직업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IMF 시절, 직장마다 인원을 감원하는데 첫 타깃이 40대 후반 이후 간부급들과 맞벌이하는 여직원들이었거든요. 그때 아직 젊은 우리는 살아남았지만 대신 맞벌이하던 여직원들은 많이 잘렸어요. 제 아내도 그때 명퇴 아닌 명퇴를 했고요. 그리고 IMF 이후 바로 나온 말이 ‘오륙도’와 ‘사오정’인데, 386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30대일 줄로만 알았던 우리가 어느 결에 40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지요.”

“직장이 서울역 부근이다 보니 오가며 그곳에 있는 노숙자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 중에는 우리 나이 정도의 정말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그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IMF 때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해 벌써 여러 해 비슷한 모습을 보지만, 볼 때마다 그들과 나의 차이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곳에 나온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전에는 직장에도 다니고 돈벌이도 했다는 얘기인데, 나하고 차이라면 나는 지금 나갈 직장이 있고 그들은 없어서 그곳으로 내몰렸다는 거지요. 제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와 그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가 아주 다른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게 천 리 밖의 자리는 아니거든요.”

“집 장만하고, 아이들 공부 가르치다 보면 사실 저축이라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어요. 한 달 한 달 생활비가 늘 빠듯합니다. 직장이라는 게 아무리 월급을 많이 주는 곳이라도 월급을 받아 돈을 벌게 하지는 않거든요. 늘 그의 규모에서 생활에 빠듯할 만큼만 주는 거예요. 그렇다 보니 들어가는 데는 많고…. 젊었을 때는 술 마시고 노느라 카드를 긁었는데, 지금은 생활비 때문에 카드를 긁는 겁니다. 그것을 상여금이 나오는 달에 간신히 갚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그게 조금씩 늘어나는 거지요.”

“일 만 배우느라 노는 법을 모른다”

“예전에 집을 사느라 대출한 부채도 있지만, 마이너스 카드에 또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카드마다 긁은 현금서비스까지 이게 다 가정부채인데, 만약 제가 어느 날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걷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지요. 저뿐 아니라 도시의 가정마다 삶이라는 게 어느 날 그 집 가장의 신상에 변화가 있으면 바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정말 열심히 안 살려고 해야 안 살 수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지요. 나 자신뿐 아니라 아직 학교에 다니는 그 아이들의 미래 인생이 지금으로서는 내 직장의 안정성에 달려 있는 겁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 그래요.”

“직장의 옛 동료나 명예퇴직해 나간 다음 다른 일을 하다 잘못된 선배들 얘기를 들으면 우울하지요. 우리가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지금 우리 나이의 직장 상사들을 보면 저 사람은 어떻게 노는 법도 모르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1주일 휴가를 이틀 어디 바닷가나 산에 갔다 오고 나머지 닷새를 집안에서만 지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휴가가 끝나면 새벽같이 회사에 나와 휴, 하고 한숨을 쉬는 거예요. 놀기도 힘들다는 거지요. 그때 우리 눈에 그분들은 일하는 것만 배우고 쉬는 것과 노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같았어요. 그렇다 보니 권고사직이든 명예퇴직이든 한 다음 당장 며칠 안에 다음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거예요.

집에서 쉬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고, 그것으로 자신이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한 느낌까지 받거든요. 그래서 노는 두려움에 쫓겨 다음 할 일을 부랴부랴 정합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면 우리야말로 선배들처럼 일하는 것만 배웠지 노는 법을 배우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경우가 바로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는 기러기 아빠인데, 지금 캐나다에 가 있는 아내와 아이를 믿지만 여기저기에서 안 좋은 소식들이 들려오면 마음이 저절로 우울해집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그런 안 좋은 소식 하나 나오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이 조심스럽게 먼저 전화를 걸어옵니다. 3년 되었는데,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죠. 이건 뭔가, 내 삶은 뭔가, 그러면 또 혼자 한잔 하고 그러죠.”

사실 이런 모든 걱정에서 벗어난 부유한 사람들은 왜 없겠으며 팔자 편한 사람들은 또 왜 많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만난 45세 언저리의 많은 직장인이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담보해서든, 신용대출을 통해서든 또 여러 은행의 마이너스 카드와 현금 서비스를 통해서든 직장인으로서 많게는 1억 원 넘게, 또 적게는 2,000만~3,000만 원 정도의 가계부채가 있었다.

소액대출들은 살림에 쓰인 돈들이 쌓여 모인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가계부채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IMF 시절의 빚을 카드로 돌려막기하고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난 그들은 자신의 건강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자기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 더욱 큰 몫으로 가족의 것이며, 스스로 건강하지 않으면 가족의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평소의 소원이든 새해의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다.

“내가 로또복권을 사는 이유”

첫마디에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얼마 만큼요” 하고 물었을 때의 대답은 각기 달랐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들은 돈만 많으면 그 즉시 지금 가슴에 안고 있는 근심과 걱정, 불안을 떨쳐내고 바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한꺼번에 돈이 많아질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 아니, 그것 역시 개개인으로 보면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전체로 보면 ‘로또복권’이 있었다. 그것의 당첨 확률이 180만 분의 1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매주 꿈을 사듯 복권을 구입한다고 했다. 하기는, 그것을 구입하는 사람이 꼭 그 세대만은 아닐 것이다. 일확천금의 꿈이야 누구나 꾼다.

“어쩌다 1주일 동안 다른 데 신경 쓰다 복권을 못 사고 토요일을 맞이하면 뭔가 내 차례의 행운을 뜻하지 않게 건너뛴 것처럼 서운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예전에 가끔 주택복권을 구입할 때는 이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로또를 구입하며 짧은 순간 아주 간절하게 거기에 매달립니다. 이 행운이 나에게 왔으면 하고 말이지요.”

“복권을 사며 가끔 그런 공상을 합니다. 전에 왜 한 사람이 400억 원 정도 당첨된 적 있잖아요? 춘천에 사는 경찰관 말이에요. 복권을 사며, 또 사지 않을 때도 내가 새로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는 거죠.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당첨 번호를 확인할 때마다 짧게 그것을 확인하는 나에 대해 쓸쓸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거의 매주 사게 돼요. 그리고는 또 한 주일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거죠.”

로또 한 게임 가격이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내렸을 때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당첨 금액이 낮아지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끼게 되더라고 했다. 그러면 당첨되었을 때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것 역시 당첨 금액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들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올해 나이 마흔다섯 언저리의 그들은 비록 상상 속이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그 행운 앞에서도 먼저 가족들을 생각했다.

“예전에는 소시민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마흔과 쉰, 그 중간에 오니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소시민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요. 386이라는 말 그대로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니던 그 시절, 저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평범한 학생으로 3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는데 1학년 때는 뭘 제대로 몰랐고, 2학년과 3학년 이태 동안은 제 소원이 하루빨리 우리나라가 민주화하는 거였어요. 정말 간절하게 그렇게 바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치 하는 사람들과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바르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사실 정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리고 소원도 내게 돈이 많아지고, 그것으로 우리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젊은 시절과 지금이 그렇게 변한 거예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마 많은 사람이 나처럼 생각할 거예요.”

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탐욕을 버린 얼굴로 말했다. 젊은 시절 그들은 우리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이루어낸 세대다. 그리고 이제 기성세대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인 직장과 가족과 소박한 꿈에 대해 말했다.

(자녀교육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일부러 뺐다. 그들 나이에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앞뒤 어느 세대나 똑같은 바람과 똑같은 기대를 하는 부분이기에 굳이 세대간의 차별성 없는 대답을 옮겨 적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글 : 이순원

(조인스 블로그 http://blog.joins.com/skc0706 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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